기억할만한 지나침
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
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
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
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
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
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
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!
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
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
어떻게 해야 할까,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
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
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
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
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
■ 기형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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■ http://suyunomo.net/?cat=7
너를 기다리는 동안
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
내가 미리 가
너를 기다리는 동안
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
내 가슴에 쿵쿵거린다
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
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
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
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
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,
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
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
너였다가,
너였다가,
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
사랑하는 이여
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
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
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
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
너는 지금 오고 있다
아주 먼 데서 지금도
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
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
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
내 가슴에 쿵쿵거리는
모든 발자국 따라
너를 기다리는 동안
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
- – -
읽는사람 까지 설레이게 하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시…
■ 황지우
꽃
사랑하는 나와
사랑하는 외투와
사랑하는 욕망과
사랑하는 헛기침과
빈방과
칙칙대는 라디오와
가물대는 그리움과
나란히 눕는다
어디선가 기웃이
소만한 꽃이
나를 들여다본다
어디서 기울어진 꽃인가
가만히 보니 꽃 뒤로
내 발바닥이 닿아 있다
■ 장석남 시집 ‘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’ 中
옆모습/안도현
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
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
나무는 사랑하면 그냥,
옆모습만 보여준다
옆모습이란 말, 얼마나 좋아
옆모습, 옆모습, 자꾸 말하다 보면
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
앞모습과 뒷모습이
그렇게 반반
들어앉아 있는 거
당신하고
나하고는
옆모습을 단 하루라도
오랫동안 바라보자
사나흘이라도 바라보자
La vita Cantaville e l’amore appassionato.
쉽지 않지만, 살아야 하고
쉽지 않지만, 사랑해야 한다
아니.
우리는 언제나 살고있었고
우리는 언제나 사랑하고 있었다
그 안에서
나는 네게 바래져갔다가
다시 내 색을 찾고
또 다시 바래져갔다가
내 색을 찾는다
그렇게 몇번이고 바래지면
이내 섞여 물들어져 버린다
내가 가진 색은 어디로
네가 가졌던 색은 어디로
…
결국 물들어져 버린 나
■ My Nostalgia No.54
Posted: March 15th, 2010
at 10:55pm by Jokerpark
Tagged with My Nostalgia, 인생은 노래하듯 사랑은 정열적으로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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